[人터view] 광주를 향한 '의기' : 비극에 대한 부채의식 / YTN

2020-05-30 17

5·18 당시 광주 바깥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려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강대를 다니던 김의기 열사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요.

가족과 지인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모교에선 매년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고 작년엔 기념사업회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광주와는 아무 연이 없음에도 목숨 걸어 광주를 알리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의기 열사 40주기를 맞아, 사람·공간·시선을 전하는 YTN 인터뷰에서 80년 5월 광주와 김의기를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20년 전 모두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향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 있을 때, 지나간 시간에 멈춘 곳이 있었다.

당시 대구에서 대학을 다니던 난 중간고사 기간에 시험도 포기한 채, 동아리 사람들과 무박 2일로 그곳을 찾았다.

[김종호 / 서강대 교수 (40)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0년 5월 17일. 20주년을 맞은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들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전남대에서 광주역, 그리고 광주교도소 등을 거쳐 마지막 항쟁지인 전남도청까지. 무고한 아픔이 서려 있는 광주 시내 곳곳을 밤새 걷고 또 걸었습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평범한 학생이던 내게 5·18은 교과서에서나 접한 빛바랜 사건이었다.

그 나이가 그렇듯 치기만 앞서던 시절, 나는 이곳의 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궁정동에 울린 총성으로 유신이 끝나고 민주에 대한 열망은 '서울의 봄'으로 나타났다.

계엄령이 내려진 1980년 5월 15일 서울역광장엔 무려 10만 명이 넘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하지만,

[문재인 / 대통령 (5·18 40주년 광주MBC 인터뷰) :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그런 빌미를 만들어주고는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과 맞서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실에 당시 (광주 밖에 있던)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이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 그것을 늘 가지고 있었고.]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광주를 본보기 삼았다.

휴교령에 거세게 저항하는 전남대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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